‘최악의 해, 무기력한 대책’.
채소 산지에서부터 유통인과 판매자에 이르기까지 입을 모아 ‘최악’이라는 말을 붙이고 있다. 산지는 물론 도매시장에서도 농산물 시세가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 이에 반해 정부의 농산물 수급조절 대책은 오히려 일부 품목에서는 시세를 지지하기 보다는 시세 반등을 꺾고 있어 무기력한 대책이라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큰 일교차에 채소류 생육 빨간불…물량 많지만 품질 하락 ‘악순환’
가격 급락 땐 수급조절매뉴얼 무용지물…도매시장 기준적용 한계
“물가정책이 농산물 수급안정 저해” 목소리…농협 제역할 주문도
▲농산물시세 악순환=사상 최악의 농산물 바닥시세는 종착점이 보이지 않고 있다. 추석 이후 배추 도매가격은 5000~6000원 대(가락시장 10kg망대 상품 기준)에 형성되며 지난해 절반 수준에 머물러있다. 무도 7000원 선(18kg상자 상품)에 그치며 지난해 같은 기간(1만3000~1만4000원)에 비해 턱없이 무너져 있다. 대파 역시 지난해 절반 이하 시세를 넘어 5년 내 가장 낮은 시세 흐름을 보이고 있다. 오이나 애호박 등 과채류를 비롯해 타 채소품목도 낮은 시세에 허덕이긴 마찬가지다.
산지 상황도 최악이다. 최근 들어 계속되고 있는 큰 일교차가 고랭지와 준고랭지 등 강원도 일대의 채소 생육에 빨간불을 켜게 하고 있다. 밤과 아침 기온이 크게 떨어지면서 결로현상 등으로 인한 생육 및 품질저하 문제가 배추와 대파 등 고랭지 작목을 중심으로 발생하고 있고, 낮 무더위는 잎 가장자리가 괴사하는 이른바 잎 끝탐병 발생 등 계속해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로 인해 산지에선 재배면적 증가 등으로 물량은 많지만 상품보다는 중하품 비중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라는 하소연이 들리고 있다.
이러한 악순환이 이어지자 농가들은 수확시기를 늦추며 출하조절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 물량이 겹치면 가을·겨울 채소 산지에도 연쇄적인 타격을 가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턱없이 미흡한 수급조절매뉴얼=농산물 수급이 문제되자 농림축산식품부는 수급조절매뉴얼을 마련해 시행하고 있지만 다발적으로 나타나는 농산물 시세하락에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일부 품목의 생산자들은 수급조절매뉴얼이 무용지물이라는 불만의 목소리도 높다.
수급조절매뉴얼의 농산물 대상은 배추·무·건고추·마늘·양파 등 5개 품목이다. 가격이 급등하거나 급락하면 매뉴얼의 위기단계별 대책이 자동 발동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가격이 급락할 때는 무용지물이라는 지적. 실제 지난 8월 무 시세가 떨어져 ‘심각단계’에 6번 들어갔고 심지어 3일 이상 연속으로 지속되는 사례가 여러 번 발생했지만 아무런 대책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게 산지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특히 위기 단계 측정을 도매시장 시세를 기준으로 하다 보니 산지실태가 반영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제기됐고, 이에 농식품부가 산지시세를 적용하겠다고 했지만 이 또한 현재까지 단 한 번도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산지의 모 농산물 출하 관계자는 “수급조절매뉴얼이 시장 시세만을 기준으로 하고 생산원가 등을 적용하지 않는 것은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만을 위한 측면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농산물 생산자는 “지난여름 배추 값이 매우 낮았는데도 수매 비축했던 봄 배추를 김치공장 등에 저가에 방출해 오히려 가격약세를 지속시킨 원인이 됐다”며 “정부 비축물량도 시세가 낮은 시기에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격안정 기본 대책은=이와 같은 문제점이 일자 지난 17일 국회에선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조경태 의원 주최로 ‘기초농산물 가격안정화 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엔 정부 관계자를 비롯해 학계와 농민단체 등이 참석해 정부 정책 등 수급·가격대책에 대한 문제점을 집중 제기했다.
이 자리에서 장경호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부소장은 “현재 정부 정책은 생산 및 출하조절 등은 생산농가에 맡기고 사후 가격안정만을 맡겠다는 것인데 효과는 미비하다”며 “생산과 출하조절에서부터 가격안정까지 연계되는 정책을 펴야하고 그렇지 않으면 땜질식, 임시 미봉책으로 끝나게 된다”고 지적했다.
한민수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회원지원센터 실장도 “공산품은 권장소비자가격을 포장지에 인쇄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농산물은 소비지 시장에서 결정된 가격을 따를 수밖에 없는데 정부가 이와 같은 공산품과 농산물의 특성을 감안하지 않은 물가정책을 펴고 있어 농산물 수급과 가격 안정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대책 마련과 농협의 역할강조에 대한 주문도 나왔다.
윤석원 중앙대 교수는 “정부정책이 단기적인 시각을 탈피해 지속가능한 농업·농촌과 식량주권 차원에서 검토해야 한다”며 “특히 농협이 오늘 이 자리에 오지 않았는데 품목조직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는 주요 이유가 농협 때문이다, 농협이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질책하고 또 조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병성·김경욱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