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농산물 도매시장은 일본 도매시장을 벤치마킹해 제도와 구조를 만들고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습니다. 다만 양국의 도매시장 성장 과정과 세부적인 여건이 다른 만큼 본받을 부분은 취하되 가지 말아야 할 길은 피해 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호소카와 마사시 일본 도매시장정책연구소 소장은 현재 도쿄 토요스시장으로 이전현대화사업에 성공한 도쿄 츠키지시장의 장장을 거쳐 홋카이도의 낙농학원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퇴직했다. 퇴임 이후에도 왕성히 일본의 농산물 도매시장 정책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근래에는 일본의 최근 도매시장 현황을 담은 ‘제3시대에 들어선 도매시장 유통’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한국식품유통학회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호소카와 소장을 만나 일본 도매시장의 성장 과정과 현황을 듣고 국내 농산물 도매유통에 주는 시사점을 살펴봤다.
# 일본의 정가·수의매매 성장은 소비지 요구에 기인
호소카와 소장에 따르면 일본은 400여 년 전 에도시대부터 위탁상을 중심으로 농산물 도매시장이 형성돼 운영됐다. 이 당시 도매시장은 위탁상이 산지의 생산자로부터 농산물을 위탁받아 판매한 후 생산자에게 정산해주는 방식이었는데 위탁상이 판매가격을 속이는 등 각종 폐단이 횡행했다.
호소카와 소장은 “1900년대 초반 도시로 인구가 유입되면서 원활한 농산물 공급을 위해 대형 도매시장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이에 일본 정부는 공설도매시장 개장을 검토했다”며 “더불어 위탁상의 문제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투명한 거래를 위해 경매제를 원칙으로 하는 ‘중앙도매시장법’을 1923년 수립했다”고 설명했다.
일본 역시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농산물 도매시장 개장 초기에는 대부분의 출하 농산물이 경매로 거래돼 1978년에는 경매 거래 비율이 83.2%에 달했다. 일본 도매시장의 거래제 변화는 소비지 시장의 변동에서 기인했다.
“일본에선 1960년대 들어 체인화된 슈퍼마켓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당시 일본에서 제일 큰 도매시장이었던 도쿄 간다시장(현 오다시장)에서 경매를 기다리는 상품들이 없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한 중도매인이 거래처인 슈퍼마켓에서 요구하는 납품 시한을 맞추기 위해 물건을 먼저 가져간 것이었습니다. 슈퍼마켓은 정해진 시일 안에 원하는 수준·수량의 물건을 납품할 것을 주문했고 경매제만으로는 상품 확보를 장담할 수 없었던 중도매인들의 요청으로 전체의 20% 내에서 선취 거래를 허용했습니다.”
다만 선취 거래한 상품은 당일 같은 품목의 경매에서 최고가에 해당하는 가격이 책정됐고 이에 대해 중도매인과 이들로부터 상품을 구매하는 슈퍼마켓의 불만이 커졌다. 더 많은 상품을 구매할수록 가격이 올라가는 경매제에 대한 소비지의 불만이 커졌고 결국 일본 정부는 1971년 중앙도매시장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도매시장법’을 시행, 경매제와 정가·수의매매를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정가·수의매매 비중은 꾸준히 성장해 오늘날 전체 도매시장 물량의 90%를 웃돌고 있다.
농가 소득과 농산물 시세를 안정적으로 유지한다는 목적에 방점이 찍힌 가운데 정부 주도하에 의도적으로 정가·수의매매를 추진하는 우리나라와는 제도 도입 배경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더불어 정가·수의매매의 선결 조건으로 여겨지는 산지조직화 역시 일본은 공설도매시장이 개장하기 이전인 1899년에 시행된 ‘농회법’에 따라 일본농업협동조합(JA)의 전신인 ‘농회’를 중심으로 상당한 수준의 산지조직화가 이뤄졌다.
더불어 우리가 기대하는 농산물 시세 안정이라는 측면에서 호소가와 소장은 다소 부정적인 의견을 나타냈다.
그는 “특정 기간만을 살펴보면 경매에 비해 정가·수의매매를 통해 거래된 농산물의 가격이 안정적으로 보일 수는 있지만 수요와 공급의 균형에 맞춰 가격이 형성됨을 고려하면 연간 평균 시세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며 “오히려 판매자·구매자 중 한쪽의 영향력이 과도하게 강하면 거래 협상 과정에서 가격이 더 폭등·폭락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최근 사과 등 국내 농산물 시세 상승과 관련해 “기본적으로 농산물 생산량이 적은 상황에서는 수요를 획기적으로 감소시키는 등 특단의 조치가 없으면 경매든 정가·수의매매든 농산물 시세가 올라가는 것을 잡는 건 무리가 있다”고 밝혔다.
# 도매시장의 위기, 자율권 보장으로 경쟁력 높여
최근 계속해서 경유율이 감소하며 위기감이 감돌고 있는 국내 농산물 도매시장과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도매시장 경유율 감소와 함께 문을 닫는 도매시장이 늘며 농산물 도매유통에 경고등이 켜진 상태다. 이에 일본 정부와 지자체, 도매시장 유통인들은 생존을 위해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호소카와 소장은 “일본 정부는 2018년 ‘개정도매시장법’을 수립하고 2020년 시행해 도매시장법인과 중도매인의 제3자판매·직접집하 금지를 풀고 청과·축산·수산·화훼 등 취급 품목 제한도 폐지했다”며 “기존 도매시장법은 도매시장 유통인들의 행위를 제한하는 규제법이었던 반면 개정도매시장법은 도매시장을 활성화하고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진흥법 성격을 띤다”고 설명했다.
지자체 등 도매시장 개설자 역시 변화하는 여건에 맞춰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호소카와 소장에 따르면 도쿄도는 도매법인에 영업 허가를 내주는 것이 아닌 도매시장 시설 사용권을 부여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도매법인이 도쿄도민에게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한다는 기본적인 역할만 충실히 한다면 그 외 어떠한 영업을 하든지 자율권을 주는 것이다.
이외에도 그는 “도매법인이 개설자 역할을 하는 민설도매시장에선 중도매인의 수를 5~6개 정도로 최소화해 도매법인과 중도매인이 협업을 강화하고 시장을 공략하는 전략이 주효해 공설도매시장에 비해 좋은 성과를 보인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