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독과점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물류기기 시장에 칼을 빼들었다. 특정업체의 의존에서 벗어나 농산물 전용 물류기기 공급체계를 구축, 생산농가의 안정적인 출하와 유통비용 절감을 도모하기로 한 것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최근 농수산물 유통구조 개선 대책의 일환으로 물류기기 시장 내 경쟁체계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파렛트 등 물류기기 시장이 특정업체가 주도하는 독과점 체제로 운영되고 있는데다 가격 공개마저 투명하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농산물 출하가 집중되는 성출하기에는 주산지에 물류기기가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고 있을 뿐만아니라 산지에 추가 비용을 요구하는 등의 폐해가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발생, 정부가 농산물 전용 물류기기 공급체계 구축을 통해 안정적인 출하를 돕겠다는 방침이다.
사실 국내 물류기기 시장은 파렛트의 경우 A사의 국내 시장점유율이 70%에 달하고 플라스틱상자 역시 B사의 시장점유율이 65%에 달할 정도로 독과점 형태로 운영되면서 농가나 산지유통주체들로서는 일방적으로 이들 업체에 끌려갈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특히 특정시기에 출하가 집중되는 품목의 경우 그 폐해는 심각하다. 수박의 경우 성출하기인 5~7월이면 다단식목재상자 부족에 산지유통주체들의 근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장마철 이전에 출하해야 하다보니 상자 수요가 급격히 늘 수 밖에 없고 적기에 공급받기 어려운 처지에 몰린 유통주체들로서는 월 40만~55만 원(2021년 기준)의 연체료를 지불하더라도 일단은 물류기기를 확보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10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출하가 집중되는 감귤·월동무·양배추·브로콜리 등을 생산하는 제주지역의 어려움은 더하다. 도매시장 하차거래 확대 등으로 성출하기에 필요한 물류기기가 컨테이너는 100만 개, 파렛트는 30만 개에 달하고 특히 파렛트의 경우 월 8만 개가량이 필요하지만 2만 개가량만 현지 조달이 가능해 나머지 6만 개는 육지에서 조달해야만 한다. 하지만 추가 요청에도 묵묵부답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히려 A사는 2022년 경영방침을 이유로 5톤 트럭(파렛트 256개) 기준 120만 원에 달하는 해상운송료까지 농가가 부담하도록 하고 공급 이용단가 인상도 추진해 산지의 부담은 더욱 커지고만 있다.
여기에 대형마트 등 유통업체들도 자사와 관리계약된 업체의 파렛트나 매장에서 직접 사용가능한 규격의 플라스틱상자로만 납품하도록 요구하고 있어 산지유통주체로서는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높은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특정업체의 물류기기를 임대해 사용할 수밖에 없다.
정부 역시 이 같은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물류기기 공동이용 사업을 통해 연합사업단·영농조합법인 등 생산자조직이 공영도매시장이나 종합유통센터에 농산물 출하 시 파렛트당 임차료의 40%인 2970원을 지원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재원이 한정돼 있어 산지수요의 40% 정도만 혜택을 받고 있다. 나머지 5000원 가량의 파렛트 비용은 산지가 고스란히 부담해야 한다. 더 큰 문제는 물류기기 공동이용 사업이 존폐 위기에 놓여 있는 점이다. 기획재정부가 도매시장 파렛트 하차거래 의무화로 물류기기 표준화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이유로 예산삭감을 추진하고 있어 현재로선 기존 예산마저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결국 정부가 십 수년간 예산을 투입해 산지출하를 지원하고 있지만 특정업체만을 통하다 보니 정작 자체적으로 물류기기 수급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역량이 없는 셈이다.
이에 농식품부는 정부 지원사업 참여 업체는 모든 농산물 물류기기 이용료 시스템(aTPool) 등재를 의무화하는 ‘물류기기 이용가격 공시제도’를 도입해 출하자가 가격을 비교해 가면서 보다 저렴한 물류기기를 이용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더불어 유통업체와 협업해 농산물 플라스틱상자 규격을 표준화하고 농협이 적극적으로 독과점 형태인 물류기기 시장에 참여해 시장 경쟁을 확대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다만 만약 농협경제지주가 신규출자 방식으로 농협물류를 통해 물류기기 사업을 수행할 경우 농식품부와 기재부가 협의해 파렛트 제작 등 물류 인프라 구축을 지원하는 방안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농식품부는 지자체와 공동으로 재원을 확보해 전체 농업용 파렛트 물량에 대한 보조단가도 유지하겠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