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3년 7월 발생한 집중호우와 산사태로 경북 영주시 장수면에 있는 명지영씨의 사과 과수원이 토사로 뒤덮여 있다.
[기후위기와 농민 인권] (중) 농민 생명·생업기반 위태
집중호우·대형산불 반복
농가경영 막대한 후유증
보험보상·지원금 받아도
이전 수준으로 회복 한계
“지원제도 대대적 개편을”
농민신문 예천·영주=김해대 기자 2024. 3. 19
경북 예천군 은풍면에서 벼농사와 한우사육을 하는 박인태씨(61)는 지난해 7월만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난다. 하룻밤 사이 200㎜가 넘는 집중호우와 산사태로 축사가 흙에 뒤덮이고, 논 일부는 유실됐기 때문이다. 박씨는 “가옥이 산사태에 쓸려 내려간 이웃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이라며 “자연재해가 갈수록 심해진다고 하니 올한해는 더 겪어보고 복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폭우·산사태…소득절벽 내몰려=기후위기가 현실로 다가오면서 사나워진 자연재해가 농촌주민을 위협하고 있다. 전례 없던 재해가 농가를 덮쳐 농민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거나, 생산기반을 송두리째 앗아가 소득 절벽으로 내모는 현상이 매년 되풀이되고 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는 2023년 발간한 제6차 종합보고서에서 기후변화가 일으키는 단기적 영향으로 ▲강하고 잦은 극한 홍수 ▲강한 열대성 폭풍 ▲건조지역 물 부족과 산불 증가를 꼽았다. 국내에서 관측된 이래 지난해 봄 평균기온은 역대 1위를 기록했고, 여름 장마철 강수량과 가을 평균기온도 세번째로 높은 ‘이상기후’가 나타났다. IPCC는 기후변화의 부정적인 영향으로 농어업 생산 감소, 감염병 확산, 산불로 인한 손해, 정신건강 악화, 퇴거 등을 꼽았다.
농촌에서는 이미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 지난해 7월 집중호우와 산사태로 경북 예천·영주·봉화·문경에서 26명, 충남 논산·청양·공주에서 4명이 사망했다. 강원 동해안 일대에서는 2019·2022·2023년 대형 산불이 발생했다. 모두 농촌 비율이 높은 지역이다.
기후변화는 농가경영에도 막대한 후유증을 남겼다. 박씨는 “정부에서 재난지원금을 받았지만, 자재 가격이 올라 종전과 같은 규모의 축사 신축은 엄두를 못 내는 상황”이라며 “흙에 뒤덮여 못 쓰게 된 농기계까지 새로 사려면 만만찮은 비용이 들 것”이라고 토로했다. 인근에서 사과농사를 짓는 권모씨(79)는 “지난해 과수원에 물이 들어찬 이후 열매와 잎이 다 떨어져 결국 250그루를 베어냈다”며 “40년 동안 사과농사를 지어왔는데, 앞으로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지 답답하다”고 한숨을 쉬었다.
기후변화는 특정 지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가 수행한 ‘기후위기와 주거권에 관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90%는 기후위기 정도를 ‘심각하다’고 평가했다. 농산어촌 주민도 기후위기 심각성을 절감했다. 같은 조사에서 농산어촌 주민은 ▲폭염(58.7%) ▲폭우·태풍·집중호우(49.7%) ▲생태계 변화(27.7%) 순으로 기후변화를 체감한다고 응답했다.
‘극한’ 수준의 재해는 복구 작업과 비용에도 부담을 준다. 영주시 장수면에서 사과 과수원을 운영하는 명지영씨(61)도 지난해 7월 산사태로 과수 3600그루가 토사에 뒤덮이는 피해를 봤다. 산 정상에서 굴러 내려온 바위와 나무 등을 굴착기 3대로 걷어내는 작업을 이제 막 시작했다. 정부 재난지원금과 농작물재해보험으로 일부 보상을 받았지만, 이전 수준의 과수원을 조성하기엔 지원이 턱없이 모자란다. 명씨는 “정부에서 받은 재난지원금은 돌을 걷어내고, 토양을 회복하는 작업에 다 써야 할 것 같다”며 “지원금을 받은 농가는 신규 과원을 조성할 때 정부 보조를 받을 수 없다고 해서 비용 부담이 클 것 같다”고 걱정했다. 이어 “사과 묘목 4000그루를 구입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만 7000만원이고, 수확하기까지 적어도 4∼5년은 기다려야 하는데 이에 대한 현실적인 지원책이 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기후변화에 작물 재배도 차질=IPCC 6차 보고서는 기후변화로 인한 농업생산 감소를 우려하고 있다. 식량·식물·생물 등을 매개로 한 감염이 증가될 것으로 예측하면서다.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의 기후위기 실태조사에서 도시민과 달리 농산어촌 주민은 기후변화를 ‘생태계 변화’에서 체감한다는 응답이 유독 많았다.
시설하우스 작물 재배에 최근 피해를 준 일조량 부족이 대표적인 사례다. 2월 영호남지역에 열흘 가까이 이어진 비로 일조량이 부족해져 멜론·딸기·수박·참외 생산에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일조량 부족으로 열매가 정상적으로 생육이 안되고, 하우스 내부 습도가 높아져 병해충도 크게 늘었다.
경북 성주에서 참외농사를 짓는 이재원씨(66)는 “과거에는 참외를 7월까지 수확할 수 있었는데 최근에는 ‘온실가루이’ 등 해충까지 급증해 5∼6월에 작기를 끝내고 있다”며 “여기에 저탄소인증 등 환경인증 요구도 높아져 농사짓기가 정말 어려워지고 있다”고 호소했다.
최범진 한국후계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정책조정실장은 “기후변화로 자연재해 발생 빈도가 늘고 강도가 세지지만, 정부가 농업분야에 펼치는 기후변화 대응 정책은 농업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 부하를 최소화하는 쪽으로만 초점을 맞춘다”며 “자연재해로 농가 피해가 계속해서 느는 만큼 복구비 지원 기준과 지원항목 단가 등을 대대적으로 개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근 유럽 각국에서 촉발된 농민 시위도 기후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시위에 참여한 프랑스 현지 농민단체들은 농업계를 향한 유럽연합(EU)의 온실가스 감축 요구와 면세유 지원 중단 방침 등에 반발하며 깃발을 들었다. IPCC 보고서도 “기후위기가 각 지역과 부문에서 불균등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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