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 해남군 문내면에 있는 겨울배추밭에서 외국인 근로자들이 수확작업을 하고 있다
인력 송출 잠정 중단 통보 와 불법 브로커 임금 착취 ‘의혹’
지난해 53개 시군 업무협약 사태 장기화 땐 인건비 상승
“계절근로자 유치·관리 업무 대행 전문기관 지정” 지적도
농민신문 하지혜, 해남=이시내 기자 2024. 1. 21
“가뜩이나 오를 대로 오른 인건비가 더 치솟지는 않을지 불안합니다.”
19일 오전 10시 전남 해남지역 곳곳에선 겨울배추 수확이 한창이었지만 농민들의 얼굴엔 근심이 어렸다. 필리핀 계절근로자 인력 송출이 잠정 중단될 거라는 소식이 지역에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이다.
법무부와 지방자치단체 등에 따르면 필리핀 정부는 11일 국내 지자체에 계절근로자 송출을 잠정 중단한다고 통보했다. 공식적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역에선 최근 국내에서 발생한 불법 브로커의 계절근로자 임금 착취 문제 등이 사건의 발단이 됐다는 추측이 나온다.
실제로 이달초, 해남에서 필리핀 계절근로자들이 한국인 불법 브로커에게 임금·노동 착취를 당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이주인권단체가 해당 브로커를 고소하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상 조사를 촉구한 상태다.
필리핀이 계절근로자 송출을 잠정 중단하면서 필리핀 지자체와 업무협약을 맺은 국내 지자체는 당장 3∼4월부터 농작업에 투입할 인력 준비에 차질을 빚게 됐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2023년 국내에 유치한 계절근로자 3만4000명 가운데 20% 이상이 필리핀인으로, 베트남인(60%) 다음으로 비중이 크다. 지난해 필리핀 지자체와 업무협약을 체결한 국내 지자체는 53개 시·군에 달한다. 그 가운데 17개 시·군은 다른 나라와의 교류 없이 오직 필리핀 지자체와 업무협약을 맺었다. 통상적으로 한번 협약을 체결하면 매년 교류를 이어간다는 점에서 올해 필리핀 계절근로자를 유치하기로 한 지자체 현황도 지난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민태홍 해남 배추생산자협회장(73)은 “우리 농촌은 외국인 근로자가 없으면 농사를 짓지 못하는 곳이 됐다”며 “배추를 파종하는 8월말부턴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바쁜데 사람을 구하지 못할까 걱정이 크다”고 토로했다.
김철규 문내농협 조합장도 “3월까지 겨울배추를 수확하는 해남 등 남부지역에선 1년 365일이 영농철인데 인력 수급에 비상이 걸리면 농작업 자체가 마비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가뜩이나 비싼 인건비가 더 오르지 않을까 우려도 나오고 있다.
3만3057㎡(1만평) 규모로 배추농사를 짓는 김호일 산이면 지사마을 이장(52)은 “농번기 때는 하루 사이에도 일당이 1만∼2만원씩 뛰곤 하는데 이번 문제가 장기화돼 외국인 인력 수급이 원활하지 않으면 인건비가 치솟는 건 당연지사”라며 한숨을 쉬었다.
3년 전만 하더라도 8만원이던 일당이 코로나19 이후 12만원으로 껑충 뛰더니 지금은 13만∼15만원이 됐는데, 사태가 장기화하면 이보다 더 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윤호 산이농협 이사는 “농산물 시세는 낮은데 인건비만 치솟고 있다”며 “그 부담은 고스란히 농가가 떠안게 된다”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관련 지자체들은 필리핀 계절근로자 입국이 잠정 중단된다고 하더라도 이를 대체할 만한 인력이 있어 파장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전남도 관계자는 “시·군별로 차이는 있지만 태국·캄보디아·라오스·타지키스탄·몽골 등 여러 국가와 계절근로자 도입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한 상황이어서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법무부와 농식품부·지자체는 이번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결혼이민자 가족 초청 방식의 계절근로자 도입을 확대하는 대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상대국 지자체와 업무협약을 맺지 않고 계절근로자를 유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관건이다.
경북의 한 지자체 관계자는 “결혼이민자 가족 초청 방식으로 계절근로자를 유치하려면 가족 정보를 파악하고 매칭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현실적으로 가장 우선적인 대안이긴 하지만, 그보다 늦어도 2월말 안에 필리핀 계절근로자 송출이 재개되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래야 3∼4월 입국서류와 건강검진 등 준비를 마친 외국인 근로자들이 5∼6월 농번기에 문제없이 투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에선 불법 브로커 문제 등으로 이번 같은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계절근로자 유치·관리 업무 전반을 대행하는 전문기관을 빨리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무부는 2022년 9월 이같은 기관을 지정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했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안은 나오지 않았다. 법무부 관계자는 “전문기관의 필요성에 공감대를 갖고 설립 방식과 운영 주체, 법적 근거 마련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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