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국산 농산물 수출을 확대하려는 미국의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 올해로 발효 11년차를 맞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미국산 농산물 관세 대부분이 철폐된 상황에서 우리의 유일한 방어수단인 검역장벽마저 무너뜨리려는 것이다.
농림축산검역본부는 7∼8일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미국 농무부(USDA) 산하 동식물검역소(APHIS) 관계자와 ‘한·미 식물검역전문가 회의’를 연다. 회의에서 양측은 상대국에 수출하고 싶은 품목에 관한 검역장벽을 없애달라고 요구할 예정이다. 한·미 검역당국은 1990년부터 연 1회 정례적으로 이같은 회의를 개최하고 있다.
이번 회의에서 미국이 우리 정부에 수입 허용을 바라는 품목은 과일·채소·식량작물 등 다양하다. 이 가운데 주된 관심은 과일에 쏠려 있다. 미국이 빠른 시일 내 수출을 희망하는 품목으로는 ▲텍사스주산 자몽 ▲11개주에서 생산되는 신선감자 ▲캘리포니아주산 넥타린(Nectarine·천도복숭아)이 꼽힌다. 지난해 회의에서도 이들 품목의 수입 허용을 요구했다.
‘텍사스주산 자몽’과 ‘캘리포니아주산 넥타린’은 미국이 수년 전부터 우리 정부에 꾸준히 수입 허용을 요구하는 대표적인 품목이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3월 내놓은 ‘2023년 국별 무역장벽보고서(NTE보고서)’에서 콕 집어 복숭아 등 핵과류와 텍사스주산 자몽의 한국 수출이 막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미국산 자몽은 현재 플로리다주에서 생산된 것만 한국에 수출할 수 있다. 미국은 이에 더해 텍사스주산까지 수입 허용 지역을 넓혀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USDA에 따르면 미국에서 자몽은 플로리다주·텍사스주·캘리포니아주 3개 주에서 주로 재배한다. 이 가운데 플로리다주가 미국 전체 자몽 재배면적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이어 텍사스주·캘리포니아주 순으로 재배면적이 넓다. 우리 정부가 이미 미국 내 자몽 최대 생산지인 플로리다주산 자몽 수입을 허용한 상황에서 텍사스주산 자몽까지 수입이 되면 사실상 미국산 자몽은 장벽 없이 국경을 넘는 셈이다.
넥타린을 포함한 복숭아의 경우 현재 우리나라로 수출이 허용된 국가가 단 한곳도 없다. 특히 복숭아는 2022년 기준 국내에서 사과·감귤 다음으로 재배면적이 넓은 과수인 만큼 수입이 허용된다면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신선감자’는 최근 들어 미국 정부가 수출 대상국을 넓히기 위해 압박 수위를 높이는 품목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미국의 경우 아이다호주·오리건주·워싱턴주 3개주에서 생산한 가공용 감자만 수입을 허용하고 있다.
미국은 감자 수입 허용 대상지역을 늘려달라고 요구하지만 우리나라는 지금도 매년 많은 양의 감자를 미국에서 수입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수입을 허용한 아이다호주는 미국을 넘어 전세계적으로도 최대 감자 산지로 유명하다. 가공용 감자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냉동감자(프렌치프라이용) 수입량은 지난해 14만1474t에 달했고, 이 가운데 절반가량이 미국산(7만9008t)이었다.
문제는 한·미 FTA 발효로 사과·배를 제외한 대부분의 미국산 과일·채소 관세가 철폐됐다는 점이다. ‘후지’ 사과와 동양배만 양허관세 20년을 확보(2032년 완전 철폐)했다. 이런 상황에서 검역장벽마저 무너진다면 미국산 농산물 수입량은 큰 폭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자몽·넥타린과 신선감자는 한·미 FTA 발효에 따라 현재 관세가 철폐된 상태다. 자몽은 기준세율 30%가 5년에 걸쳐 폐지됐으며, 넥타린은 기존 관세율 45%가 10년에 걸쳐 폐지돼 2022년부터 0%가 됐다. 감자의 경우 냉동감자는 18%였던 관세율이 한·미 FTA 발효로 바로 폐지됐으며, 칩용 신선감자는 304%의 높은 관세율이 2022년부터 0%가 됐다. 일반 식용 신선감자는 고관세를 유지하는 대신 무관세쿼터를 제공했다.
미국의 요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국 검역당국은 수출을 위해 지속 논의가 필요한 품목으로 ▲아기당근(일반 당근보다 작은 당근) ▲캘리포니아주·워싱턴주산 블루베리 ▲냉동블랙베리류 ▲캘리포니아주산 딸기·핵과류 ▲사과·서양배 등을 선정했다.
검역본부 관계자는 “미국 검역당국과의 협상에서 국내 농업과 농민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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