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국 SPS 조치 남용 막겠다”
과학적 절차 등 기준 크게 강화
한국, 농업보호 전략 활용 못해
국산 농축산물시장 타격 불가피
농민신문 양석훈 기자 2023. 8. 3
새로운 통상질서의 대세로 자리 잡은 대형(메가) 자유무역협정(FTA)의 공통점은 수입국이 동식물 위생·검역(SPS) 규범을 임의로 적용하지 못하도록 기준을 크게 강화했다는 점이다. SPS 조치가 농축산물 교역을 가로막는 비관세장벽으로 활용되는 사례가 끊이지 않자 SPS 조치 단행 때 과학적이고 투명한 절차를 요구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강화된 SPS 규범은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등 다른 통상 협상에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가 새 통상질서로의 편입을 서두르는 상황에서, 수입 농축산물 공습을 비관세장벽으로 겨우 막아온 우리 농업에 또 한번 커다란 파고가 닥치는 셈이다.
◆메가 FTA, SPS 분쟁 속전속결 처리=우후죽순으로 체결한 FTA로 주요 품목의 관세가 철폐 또는 인하된 가운데 지금까지 한국은 검역장벽을 활용해 농업을 우회적으로 보호해왔다. 병해충과 악성 가축전염병의 국내 유입을 막는다는 구실로 신선과일과 축산물 수입을 차단했다. 하지만 통상질서가 메가 FTA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이런 전략에 일대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최근 메가 FTA SPS 규범의 국제 논의 동향 및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알셉),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 등 메가 FTA는 공히 세계무역기구(WTO) 이상의 SPS 규범을 포함하고 있다.
종전 양자 FTA는 WTO SPS 규범을 준용하는 수준이었고, 이에 따라 SPS 분쟁이 발생해도 FTA 분쟁해결절차 대신 WTO 분쟁해결절차를 활용했다. 이 절차에 수개월이 소요되고 때로는 결론 도출이 무기한 연기되기도 해서 수입국은 오랜 기간 수입제한 조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메가 FTA는 다르다. CPTPP는 SPS 분쟁 때 협력적기술협의절차를 통해 180일 안에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고 있다. 관련 회의가 조기에 열릴 기미가 안 보이면 곧바로 FTA 분쟁해결절차를 활용하도록 하는데, 이 절차는 1심제에 패널 구성 후 150일 안에 결론을 내는 게 원칙이다. RCEP은 SPS 이슈를 FTA 분쟁해결절차 대상에 포함할지를 내년부터 검토한다.
◆SPS 규범 어떻게 강화됐나=SPS 규범 적용 기준도 WTO보다 강화됐다. 대표적인 게 지역화다. 지역화란 한 국가에서 병해충이 발생했어도 병해충이 미발생한 지역에서는 수입을 허용하는 개념이다. WTO도 인정하는 개념이지만, 지금까진 수입국이 까다로운 지역화 인정 절차를 내세울 경우 인정받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메가 FTA는 수출국이 지역화 인정을 요구하면 수입국이 ‘합리적 기간 안에’ 평가를 시작하도록 했다. 특히 USMCA는 ‘지체 없는’ 평가 개시를 의무화했다.
더구나 CPTPP와 USMCA는 지역화보다 더 세밀한 구획화를 인정한다. 농축산물이 생산·유통되는 계통 단위로 수입검역을 진행하는 개념이다. 보고서는 “해당 조항이 선언적일 뿐 구체적 의무를 규정하진 않는다”면서도 “구획화가 인정되면 (수출국이) 관련 규정 위반을 주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위험성을 이유로 수입을 막는 것도 제한한다. WTO는 국민이나 동식물에 위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수입국이 SPS 조치를 취할 수 있게 인정한다. 하지만 과학적 근거 없이 SPS 조치를 남용한다는 지적이 수출국에서 잇따르자 메가 FTA는 수입국이 위험 분석 진전 상황과 발생 가능한 지연 요소 등을 수출국에 통보하도록 의무화했다.
특히 WTO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할 때도 잠정적인 SPS 조치(긴급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데 반해, CPTPP는 긴급조치 발동 때 즉시 상대국에 통보하고 6개월 내 과학적 근거를 재검토하도록 했다.
◆비관세장벽 대폭 낮아질 우려=우리가 CPTPP에 가입하면 이런 규범을 모두 수용해야 하는 것도 부담이지만, 이런 규범이 우리나라의 다른 통상 협상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 역시 큰 문제다. 우선 IPEF가 고비다. 보고서는 “IPEF는 농업분야 규제 및 행정 요건 개선 등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면서 “메가 FTA SPS 규범이 IPEF 농업분야에 포함될 수 있다”고 밝혔다.
기체결 FTA 재협상도 걱정거리다. 일례로 우리나라는 한·영 FTA 재협상을 준비 중인데, 영국은 최근 영·호주 FTA 등에서 높은 수준의 SPS 규범 적용 기준을 포함했을 뿐 아니라 CPTPP 가입도 올 3월 확정돼 CPTPP 수준의 SPS 규범을 요구할 수 있다.
한국은 1995∼2022년 WTO 회원국 중 10번째로 많은 912건의 SPS 조치를 통보했다. 이를 통해 국민 식탁과 농업이 보호받는 효과를 봤다. SPS 규범 적용 기준이 강화되면 국산 농축산물 타격은 불가피하다. 보고서는 “메가 FTA 수준의 SPS 챕터를 수용할 경우 우리 SPS 조치가 심판대 위에 설 가능성이 작지 않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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