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디지털 통상협정 추진에 속도를 내는 가운데 스마트농업시장 규모가 커진 국내 농업부문도 관련 협정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산업통상자원부는 8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각료회의를 계기로 한국의 디지털경제동반자협정(DEPA) 가입협상을 실질 타결했다고 밝혔다. DEPA는 싱가포르·칠레·뉴질랜드 3개국이 체결한 디지털 통상협정이다. 우리나라는 2021년 10월 가입 절차에 나선 이후 6차례 협상을 거쳐 이번에 실질적인 타결에 이르렀다. 올 1월 발효된 한·싱가포르 디지털동반자협정(KSDPA)에 이어 우리나라가 참여한 두번째 디지털 통상협정이다.
본격적으로 ‘디지털’을 내건 통상협정에 참여하는 것은 최근의 일이지만 기체결된 통상협정도 디지털 무역에 관한 규범을 다루고 있다. 지난해 발효 10주년을 맞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물론 2020년 최종 타결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알셉)도 디지털 통상규범을 포함한다. 다만 최근 들어 통상협정은 디지털 통상규범을 중요한 비중으로 다루거나 자유화 수준을 높이는 추세다. 한국을 포함해 14개국이 참여한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와 정부가 꾸준히 가입 의사를 밝힌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이 대표적인 예다.
그동안 농업계는 정부가 통상협정 가입 의사를 밝히면 농축산물의 관세·비관세 장벽 완화 여부에만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최근 국내 농업에서는 스마트팜, 클라우드 서비스, 빅데이터 등 디지털 통상규범 대상이 되는 스마트농업 규모가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가 추진하는 디지털 통상협정에 대해서도 국내 농업 상황에 맞는 통상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디지털 통상협정은 디지털 상품과 서비스가 국경을 넘어 거래될 때 어떠한 무역규범을 적용할 것인지를 두고 국가간 체결하는 무역협정이라고 보면 된다. 디지털 제품을 어떻게 분류할지부터 시작해 데이터 이동에 관한 규정, 데이터의 개인정보 보호, 플랫폼업체의 컴퓨터 설비 위치까지 다양한 통상규범이 협상 안건으로 올라온다.
기존 FTA 협상 때 우리나라가 농산물시장 개방폭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상대국과 치열하게 협상하는 것처럼 디지털 통상협정에서도 각국은 자국의 유불리를 따진다.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온라인플랫폼 기업을 다수 보유한 미국은 디지털 무역에서도 시장접근을 제한하는 장벽을 최대한 허물자는 입장을 취한다. 반면 유럽연합(EU)·러시아·중국 등은 자국의 디지털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안전장치를 마련한다.
우리나라는 스마트농업분야에 있어 국내 산업을 보호하는 데 주안점을 둬야 한다는 주문이 나온다. 국내 스마트농업 기술은 이 분야 최고 기술국인 EU 대비 70% 수준으로 4년의 기술 격차가 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에 따르면 노지농업분야는 스마트화 기술개발이 더딘 편이며, 시설농업분야는 상용화 단계에 도달했지만 스마트농업 핵심 부품이나 장비의 외국산 비율이 아직 높다.
문한필 전남대학교 농업경제학과 교수는 “국내 스마트팜 기업은 개발도상국으로 스마트팜을 일부 수출하고는 있지만 내수시장에서 글로벌 디지털 농식품 기업과의 경쟁 압력이 심하다”며 “디지털 무역 관련 국제분쟁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안전하고 보수적인 전략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글로벌 기업들이 국내에서 수집하는 농업 데이터를 무분별하게 이전하거나 활용할 수 없도록 규제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예를 들어 스마트팜 업체들은 스마트팜 설비를 통해 농가들의 영농기술이 담긴 데이터를 수집·활용할 수 있다. 스마트팜 도입 초기와 달리 최근에는 국내 업체들의 시장점유율이 많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해외 업체들이 높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국내 시장을 장악한 상황에서 국내 농업 데이터의 지식재산권 보호는 중요한 과제로 꼽힌다.
문 교수는 “글로벌 스마트팜 플랫폼 기업들이 국내에서 수집한 데이터를 국내 경쟁사와 공유해야 하는 의무를 지우고 무분별하게 영농기술 관련 영업비밀을 수집하는 행위를 금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