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술 농협농식품가공공장 고춧가루류협의회장(경북 남영양농협 조합장, 왼쪽)이 농가와 함께 아주심기(정식)한 고추 모종 상태를 살피고 있다
영농철 인력 구하기 힘들고 인건비 등 경영비 크게 늘어
고추값은 떨어져 농가 울상 영농규모 축소 움직임 확산
“정부, 생산안정대책 마련을”
농민신문 안동·영양=김동욱, 괴산·제천=황송민 기자 2022. 5. 9
고추 주산지 생산기반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심각한 인력난 속에 일손 구하기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인건비마저 급등해 생산비 부담이 커지고 있지만 고추값은 바닥을 면치 못해 농민들이 힘들게 농사지어도 수익을 못 내고 있기 때문이다. 농사 여건이 악화하면서 올들어 영농규모 축소 움직임이 급속히 확산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국내 고추 생산이 회복 불능 상황에 처할 것이란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인력난에 속 타는 산지=“요즘 고추농사는 인부 일정에 맞춰 움직여야지 안 그러면 농사 못 짓습니다.” 경북 영양 고추농가 정기효씨(60)는 최근 고추 아주심기(정식) 시기를 맞아 인력난이 더 심각해졌다고 전했다. 24년째 고추농사를 짓는 정씨는 “워낙 인부 구하기가 어렵다보니 지금은 농가에서 원하는 날짜가 아닌 인력이 공급되는 날짜에 맞춰 아주심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그는 “인력난이 극심하다보니 농가들이 연초에 세운 영농 계획대로 농작업을 하지 못하고 인력이 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게 보통”이라며 “기다리는 동안 혹여라도 모종이 웃자랄까 애태우다보면 ‘이렇게까지 해서 농사지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훌쩍 뛰어오른 인건비=심화하는 인력난에 인건비만 속절없이 뛰어올라 농민들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충북 괴산군 칠성면에서 1만9800㎡(6000평) 고추농사를 짓는 이홍규씨(60)는 고추 아주심기에 인력 수요가 집중돼 인력난이 심화할 것을 우려해 올해 아주심기를 다른 농가보다 열흘 앞당겼지만 사정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이씨는 “아주심기가 몰리는 시기를 피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인건비로 지난해보다 20% 정도 오른 13만원을 줘야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마저도 다급하게 인력사무소 여러곳에 전화를 걸어 겨우 필요한 인력을 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보다 20∼30% 오른 인건비를 부담해도 필요로 하는 인력을 제때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다보니 농민들 사이에선 ‘대기표 뽑고 기다린다’라는 자조 섞인 말이 돌고 있다.
지금도 문제지만 앞으로 다가올 수확기는 더 걱정이다. 경북 영양에서 올해 1만6529㎡(5000평) 고추농사를 준비한 신병칠(55)씨는 “수확기에는 30일가량 작업해야 하는데 지금도 난리인 인력 수급이 그때라고 제대로 될지, 인건비는 또 얼마나 오를지 암담할 따름”이라며 한숨지었다.
◆거꾸로 가는 고추값=극심한 인력난에 인건비까지 급등해 고추농사 어려움이 가중하고 있지만 고추 시세는 바닥을 맴돌고 있다. 신병칠씨는 “인건비를 비롯해 모종·비료·농약 등 모든 농자재값이 다 올랐는데 고추값은 곤두박질해 농민들은 지금 속이 끓다 못해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실제로 서안동농협(조합장 박영동) 고추공판장의 4월 평균 건고추 가격은 화건 상품 600g(한근)에 7011원으로 지난해 1만396원에 견줘 32.5%나 떨어졌다. 평년에 견줘도 12.2% 낮은 수준이다. 지난해 고추값 폭락으로 큰 손해를 입었다는 충북 괴산 농민 송규천씨(74)는 “올해도 건고추값이 지난해처럼 7000∼8000원에 머물면 고추농사를 접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흔들리는 생산기반=심각한 인력난 속에 수익성 악화를 넘어 눈덩이 손실까지 우려하는 상황에 이르자 결국 견디다 못해 농사규모를 줄이거나 아예 농사를 포기하는 농민들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충북 제천시 봉양읍에서 40년째 고추농사를 짓고 있는 김순남씨(63)는 인력난과 생산비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지난해 5만6100㎡(1만7000평)에 달했던 고추 면적을 올해 3만9600㎡(1만2000평)로 30%나 줄였다. 김씨는 “올해 인력을 구하기 너무 힘들어 아주심기 시기를 열흘 정도 늦췄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결국 김씨는 봉양농협(조합장 홍성주) 도움을 받고, 고추 면적을 대폭 축소한 뒤에야 농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고추농가 재배의향면적은 2만9782㏊로 지난해 3만3373㏊에 견줘 무려 10.8%나 감소한 것으로 조사됐다. 농경연은 인건비 상승과 산지 가격 하락을 그 원인으로 지목했다. 조연수 서안동농협 고추공판장 경매사는 “인건비 상승과 고추 시세 하락이 맞물려 모종 판매량이 지난해보다 10∼15% 줄어든 것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생산 안정화 대책 시급=주산지 농민들은 지금 상황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머잖아 고추 생산이 반토막 나는 상황까지 내몰린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김순남씨는 “인력난은 갈수록 심화하고 인건비를 비롯한 생산비는 급등하는데 고추값이 계속 바닥을 긴다면 조만간 농사를 포기하는 농가가 속출할 것”이라며 인력난과 농자재값 급등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을 주문했다.
송규천씨는 “고추값이 적어도 1만4000원 이상 돼야 농민들이 농사에 전념할 수 있는데 고추값이 좀 오르면 발 빠르게 수입해 값을 떨어뜨리다보니 생산이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박명술 농협농식품가공공장 고춧가루류협의회장(경북 남영양농협 조합장)은 “고추 생산기반 안정을 위해선 인력 대책과 더불어 시세 안정이 중요하다”며 “국내산 시세 흐름을 교란하는 외국산 고춧가루류에 보다 엄격한 추적·관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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