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로 국내 농업에 막대한 피해가 우려되자 정부는 20조원대 재정을 투입해 국내농업 경쟁력을 높이고 피해 농민을 구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 정부 대책이 한·미 FTA라는 거대한 파고로부터 국내 농업을 지키기엔 역부족이었다는 평가가 현시점에서 나온다. 특히 현장 체감도가 높은 직접피해보전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점이 문제로 지목된다.
◆한·미 FTA 국내 보완대책 내용은=2007년 한·미 FTA 타결 직후 정부는 20조4000억원 규모로 ‘한·미 FTA 체결에 따른 국내 보완대책’을 마련했다. 한·미 FTA 발효는 2012년이었지만 대책 가운데 국내 농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조속한 추진이 필요한 사업은 2008년부터 예산에 반영해 시행했다.
이후 정부는 2012년 1월 국회 비준을 앞두고 2조7000억원 규모로 추가 대책을 마련했다. 이에 따라 농업분야에 배정된 한·미 FTA 투융자 규모는 23조1000억원으로 증액됐다.
정부 대책은 국내 농업 체질 개선 및 경쟁력 제고를 위한 중장기 투융자사업과 농가 피해를 직접 보전하는 단기적 차원의 직접피해지원제도로 구성됐다.
◆기존 사업과 중첩되고 집행률도 떨어져=20조원대 재정 지원은 얼핏 커보이나 사실 부풀려진 측면이 있다. 이중 절반인 12조원가량은 정부가 한·칠레 FTA 체결 이후 마련한 119조원 규모 투융자계획과 중첩된다. 새로 배정한 예산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예산을 수정·보완만 했다는 의미다. 그나마 나머지 재정의 상당 부분도 농가에 대한 순수 지원이 아니라 융자사업에 쓰였다.
실제 정부가 2007년 마련한 대책을 사업별로 봐도 61개 사업 중 신규 사업은 25개에 불과했다. 국회 관계자는 한·미 FTA 대책에 대해 “기존 예정된 예산을 제외하면 순수 피해대책 예산은 크지 않다”고 분석했다. 한 농민단체 관계자 역시 “세제 지원과 면세유 일몰 연장 등 종전부터 하던 사업들이 대거 포함됐는데 이를 FTA 대책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밝혔다.
배정된 예산이 실속 있게 집행된 것도 아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08∼2020년 FTA에 대응한 농업분야 투융자 규모는 한·유럽연합(EU) FTA와 한·중 FTA 등을 거치면서 37조3847억원으로 확대됐는데 이 가운데 실제로 집행된 예산은 33조574억원(집행률 88.4%)에 그쳤다.
◆피해 예상 품목 위주 대책 한계=한·미 FTA가 국내 농업 전반에 광범위한 피해를 준 반면 대책은 일부 피해 예상 품목 중심으로 수립된 점도 한계로 꼽힌다. 일례로 한·미 FTA 대책을 통해 축사시설 현대화사업 등은 확대됐지만 농촌지역 개발과 복지 관련 사업들은 필요성이 거론됐음에도 FTA와 연관성이 낮다는 이유로 예산이 배정되지 않았다.
문한필 전남대학교 농업경제학과 부교수는 “한·미 FTA 대책은 개방 품목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초점이 맞춰졌지만 실제론 농업 전면 개방으로 산업 부가가치가 낮아지고 노동과 자본이 다른 산업으로 이동하면서 농촌이 공동화하는 광범위한 피해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향후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등의 가입을 추진할 때는 수입 농산물 관세 인하에 따른 직접피해지원 외에도 농업인력 육성, 지역 개발 등 거시적 관점의 지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직접피해보전제도 성과 들쭉날쭉=농가 피부에 와닿는 직접피해보전제도의 실효성 문제도 논란거리다. 정부는 한·미 FTA 발효를 앞두고 2004년 마련한 FTA 피해보전직불제 발동 기준을 종전 ‘국내산 가격이 평년가격의 80% 미만으로 하락할 것’에서 ‘90% 미만’으로 완화했다.
하지만 현장에선 해당 조건이 여전히 까다로워 제도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특히 또다른 직접피해보전제도인 폐업지원제는 피해보전직불제 대상 품목 중 투자비용이 커 폐업 때 비용 회수가 곤란한 품목을 지원하는 것이어서 피해보전직불제가 발동하지 않으면 덩달아 멈춰서는 문제가 있다. 두 사업의 예산집행률이 2017∼2019년 0.5∼22%에 그친 것도 이런 문제 때문이다. 이정환 GS&J 인스티튜트 이사장은 “가격이 단 1%만 하락해도 피해가 발생한 것인 만큼 피해보전직불제 가격요건을 평년가격의 90%가 아니라 100%로 올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더구나 폐업지원제는 유명무실하게 운영되다 지난해 일몰을 맞았다. 전문가들은 기존 FTA 재협상과 CPTPP 등 신규 FTA를 앞둔 만큼 폐업지원제 부활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문 교수는 “농업자원이 경쟁력 있는 농가 중심으로 재배분될 수 있도록 ‘구조조정’ 명목의 지원사업을 지속 추진할 필요가 있다”면서 “다만 예산이 유동적인 피해보전직불제와 묶을 게 아니라 별도 고정적 예산을 배분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