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홍 전남농협지역본부장(왼쪽부터)과 김경채 한국무배추생산자연합회장 등이 무름병이 심각한 배추밭에서 피해 상황을 살피고 있다.
전남 배추 주산지 가보니
수확량 감소 예상되는데 가격은 되레 떨어지고 있어
물량 준다 이야기 나돌면 정부 ‘수입 카드’ 꺼내들라
고민거리 쌓이며 한숨만
농민신문 해남, 진도 + 이상희 기자 2021. 11. 01
“심한 데는 절반도 못 건질 정도입니다. 일손도 없는데 배추 하나하나 확인해가며 수확하면 비용이 더 드니 아예 포기하는 밭도 있고요. 그렇다고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합니다. 배추 없다고 소문났다가 정부가 김장철에 배추값 오를까봐 덜컥 수입이라도 해버리면 어떡하나 해서요.”
전남 해남·진도 등 주산지 배추농가들이 수확기를 앞두고 이중 삼중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9월초 정식기의 잦은 비와 10월까지 이어진 고온현상으로 가을·겨울 배추에 무름병이 확산하면서 수확량 감소가 예상돼서다. 게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식당 수요 등이 크게 줄어 가격 상승을 기대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실제로 10월말 현재 서울 가락시장에서 배추는 10㎏들이 상품 한망당 6000원 안팎에 거래되고 있다. 지난해 10월 평균 거래가격 9481원보다 3000원 이상 낮고, 평년 10월 평균인 7851원에 비해서도 1800원가량 떨어진 값이다. 이런 추세라면 김장 성수기인 11월에 접어들어도 가격 반등은 없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산지에서 “수확량이 줄면 그만큼 배추값이 올라가야 농가도 손해를 안 볼 텐데 배추값은 안 오르고 무름병 피해만 늘어가니 한숨만 나온다”는 하소연이 쏟아지는 이유다.
설상가상으로 농가들 사이에서는 혹시 정부가 김장철을 앞두고 ‘배추 수입’ 카드를 꺼내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나오고 있다. 무름병으로 생산량 감소가 예상된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배추값 상승을 막기 위해 정부가 나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수확량이 줄어든 만큼 가격이 오르지 않으면 농가소득이 줄 것이 뻔한데도 일부 농가는 배추값이 이 수준에서 더는 오르지 않기를 바랄 정도다.
배추농가 박칠성씨(60·해남군 황산면)는 “외국인 근로자의 일당이 15만원까지 치솟는 등 생산비는 급증했는데 농산물은 가격이 조금만 오를라치면 정부가 수입해오는 바람에 농가들만 피해를 보고 있다”면서 “정부가 농산물 수급조절이 아니라 물가조절만 하는 것 같아 원망스럽다”고 말했다.
김경채 한국무배추생산자연합회장(해남 황산농협 조합장)은 “병해충 발생 등으로 수확량이 감소해도 생산비는 똑같이 들거나 오히려 더 늘기까지 한다”며 “이럴 때 수입해 가격이 떨어지면 농가는 이중으로 피해를 보게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서민 물가도 중요하지만 농가소득 안정도 중요한 만큼 정부는 농산물 수입 여부를 결정할 때 좀더 신중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전남 산지농협들은 겨울배추의 조기 출하를 검토하는 등 김장철 배추 공급에 차질이 없도록 하는 방안을 고심 중이다. 공급 조절을 통해 선제적으로 가격을 관리해 정부가 수입이라는 카드를 꺼내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서정원 해남 화원농협 조합장은 “전남의 경우 피해가 없는 밭은 생육 상태가 좋은 편인 데다 겨울배추 조기 출하도 가능하다”면서 “전체적으로 김치 수요가 감소해 김장철 배추 공급에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배추 피해를 재해로 인정해달라는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 이번 무름병 발생은 정식기에 잦은 비로 배추가 물기를 잔뜩 머금은 상태에서 10월 중순까지 낮 최고기온이 30℃를 넘나드는 고온현상이 이어지는 등 이상기후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진도의 배추농가 박양규씨(67)는 “배추농사를 15년 넘게 지으면서 이렇게 무름병이 심하게 온 것은 처음”이라면서 “병 발생 자체가 날씨 때문이니 이상기후로 인한 재해로 보고 정부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