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초대형 자유무역협정(FTA)인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대한 가입 ‘검토’를 넘어 ‘준비’를 추진하는 것으로 나타나면서 농업계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CPTPP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11개국이 참여하는 다자간 FTA다. 기존 FTA보다 개방 수준이 높아 우리나라가 가입하면 국내 축산업과 과수산업 등에 큰 파장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도 정부가 CPTPP 기준에 맞춰 동식물 위생·검역(SPS) 관련 법령을 정비할 움직임을 보이자 농업계는 “사전 설명도 없는 일방적 처사”라고 비판했다.
관계부처에 따르면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5일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CPTPP 가입을 대비한 제도 개선방안을 논의했다. 후발주자로 회원국이 되려는 입장이다보니 CPTPP의 기존 질서와 요구를 따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CPTPP에 가입하기 위해선 ▲SPS ▲국영기업 ▲수산보조금 ▲디지털 통상 등 4대 분야의 정비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날 회의에서 주로 검토된 건 농업분야와 관련이 깊은 SPS와 국영기업 문제였다. 홍 부총리는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국내 SPS 인력·인프라를 확충하고 관련 법령을 정비하려 한다”고 밝혔다. CPTPP는 농축산물 수입 허용 여부 평가 단위를 국가·지역이 아닌 특정 구역이나 개별 농장 단위로 좁게 적용하고 있는데 우리도 여기에 맞춰 제도를 손보겠다는 뜻이다.
농업계는 뒤늦게 이같은 회의 소식을 접하고 강하게 반발했다. 올초 CPTPP 가입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던 정부가 6개월 만에 사실상 가입을 전제로 사전 준비에 착수했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이런 진전이 이뤄지는 동안 핵심 피해 산업인 농업계에 이렇다 할 설명이 없었다는 점이 불통 논란까지 낳는 모양새다.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는 성명을 통해 “(농업계는) 지속해서 CPTPP 참여를 반대해왔는데도, 정부는 농업계에 별다른 설명을 않고 이해도 구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가입을 추진하고 있다”며 “농업분야의 희생을 전제로 한 현 정부의 대외경제정책을 두고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정의와 공정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따졌다.
우리나라가 SPS 기준을 현행 국가 단위에서 특정 구역이나 농장 단위로 완화하면 신선농축산물 검역장벽이 낮아지면서 주요 과수산업과 축산업이 붕괴 국면으로 치닫게 될 것이란 우려가 높다.
가축질병과 병해충 발생을 근거로 주요 수출국을 수입금지 지역으로 지정하는 바이오안보 전략이 무력화할 수 있어서다. CPTPP가 개별 농장 단위로 수입 허용 여부를 평가하는 ‘구획화’ 개념을 들고나온 배경도 SPS 조치가 비관세장벽으로 작용하지 않게 하려는 데 있다.
CPTPP에 한발 늦게 뛰어드는 입장료를 농업분야가 물게 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기존 회원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민감품목 개방을 추가로 요구받는다면 농업피해는 예상보다 크게 불어날 수 있다. 임정빈 서울대학교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CPTPP에 가입한다면 농축산물 관세의 추가 인하는 물론이고 SPS 조치의 완화 등 농업분야에서 부담하게 될 가입료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학구 한농연 회장은 “우리나라는 CPTPP 11개 회원국 가운데 10개국과 이미 FTA를 체결한 데다 후발주자인 만큼 가입 과정에서 높은 수준의 대가를 지불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어떤 수준으로 SPS 관련 법령을 손보고 CPTPP 협상에 임할지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공식적으론 CPTPP 가입을 여전히 ‘적극 검토’하고 있다는 게 정부 입장이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대외경제장관회의 논의는 CPTPP 가입 준비를 전제한 것이 아니라 연초에 밝힌 대로 적극 검토하는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라며 “SPS 관련 법령 개정과 인력·인프라 확충 등을 추진하는 것은 CPTPP 때문만이 아니라 내년 발효 예정인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알셉) 등의 이행을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