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산지 유통인이 서울 가락시장에 출하한 수박. 동일한 박스에 담겨 있지만 각각 다른 상표가 부착돼 있어 상표가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부 산지유통인 불법 자행 지역농협 감시해도 소용없어
유통물량 80% 밭떼기거래 경매장서 버젓이 스티커 붙여
법 적용 달라 농가 대처 어려워 개별포장·유통구조 개선 필요
농민신문 이민우 기자 2021. 6. 28
수박 상표를 불법 도용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일부 산지 유통인이 수박값을 더 받기 위해 유명 주산지나 생산자단체의 상표를 무단 도용하는 불법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현 상황을 방치하면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피해가 커질 수 있어 단속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상표 도용으로 피해 보는 농가=경북 고령 우곡그린수박영농조합법인의 박명회 국장은 최근 황당한 전화 한통을 받았다. 자신을 인천 서구에 사는 주부라고 밝힌 최진옥씨(64·금곡동)는 동네 과일가게에서 구매한 <우곡 그린 수박>이 맛없다며 분통을 터뜨렸는데, <우곡 그린 수박>은 이미 출하가 마무리된 지 3주 이상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박 국장에게 전화한 최씨는 “동네 과일가게에서 <우곡 그린 수박>을 구매했는데 크기만 클 뿐 당도가 떨어지고 육질도 형편없어 상표에 적힌 번호로 항의전화를 한 것”이라며 “나중에 상표를 도용당한 것 같다는 박 국장의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고 말했다.
박 국장은 “<우곡 그린 수박> 상표 도용을 막기 위해 동고령농협과 함께 5월 한달간 서울 가락시장에서 감시활동을 벌이는 등 총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소용없었다”며 “언제까지 이런 피해를 봐야 할지 모르겠다”고 허탈해했다.
이런 수박 상표 도용 사례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게 유통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서울 가락시장의 경매 현장을 둘러보면 경매장에서 수박에 상표를 부착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수수료를 받고 상표를 전문으로 붙여주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서울 가락시장의 한 경매사는 “<우곡 그린 수박>처럼 유명 상표를 도용하면 수박 1개당 최대 3000원까지 더 받을 수 있다”며 “상품성이 떨어지는 물건에 유명 상표를 부착해 경락값을 더 받으려는 시도가 종종 발생한다”고 귀띔했다.
가락시장의 한 중도매인은 “모양과 색깔로는 어느 지역 수박이라는 것을 100% 확신할 수 없다”며 “상인들의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수박의 경우 상표 관리가 제대로 안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대부분 생산자 손 떠나 유통…상표 도용은 산지 유통인이 주도=전문가들은 유독 수박에서 상표 도용문제가 불거지는 것은 품목 특성과 독특한 유통구조가 원인이라고 입을 모은다.
수박은 다단식 목재상자(우든칼라)나 벌크 상태로 출하된 뒤 도매시장에서 상표 스티커를 붙여 유통되는 게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수박에 붙이는 스티커만 교체하면 상표 도용이 쉽게 이뤄진다.
또 전체 유통물량의 80%가량이 산지 유통인에 의한 밭떼기거래로 유통되고, 20% 정도 물량만이 농협·생산자조직을 통해 계통출하된다. 물량 대부분이 생산자 손을 떠나 유통되다보니 수박 상표 관리가 허술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몇몇 산지 유통인은 수년 전부터 유명 수박 주산지의 상표를 지속적으로 도용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단속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복잡한 법 현실에 농가 대처 불가능=산지 농가들이 수박 상표 도용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다. 상표 도용은 경우에 따라 상표법 위반이 될 수도, 원산지 표시법 위반이 될 수도 있는데 어떤 법을 적용받느냐에 따라 주무부처가 달라진다. ‘농수산물의 원산지 표시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5조 제1항 별표1을 보면 원산지 표시기준은 ‘그 농산물을 생산·채취·사육한 지역의 시·도명이나 시·군·구명을 표시한다’고 규정돼 있다.
<우곡 그린 수박>의 경우 시·도 또는 시·군·구에 해당하지 않아 원산지 표시법에 적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상표권 등록이 돼 있지 않으면 상표법에 따른 법적 권리도 보호받지 못한다.
한 산지조직 관계자는 “도용 사례를 고발하려 해도 어디로 하는지 몰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며 “적어도 농산물 관련 신고는 창구를 일원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상표 도용 단속을 강화하고, 산지에서 수박 개별포장 추진을 적극 고려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온다. 김병률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주무부처가 불법 사례를 명확히 고시한 뒤 단속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며 “상표 도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산지에서 개별포장을 확대하는 등 다양한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