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인력난에 허덕이는데”...수확기 어떻게 버틸지 막막
농수축산신문 이문예 기자 2021. 6. 15
“자칫하면 ‘저녁 있는 삶’이 아니라 ‘저녁도 못 먹는 삶’이 될 수도 있어요. 임금이 만족스럽지 못하니 저녁이면 다른 곳에 가서 추가 노동을 하는 상황이 생기지 않겠어요?”
- 김대웅 씨(밀양농협 원예농산물산지유통센터)
“비용이야 더 지불하면 되죠. 근데 문제는 비용을 지불해도 제대로 된 인력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지금도 사람 구하려면 하늘의 별 따기인데... 막막합니다.”
- 오경호 씨(남원농협APC)
“제도를 100% 활용해도 인력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데 노무사들도 동의하고 있습니다. 머리를 맞대 대책을 마련하고는 있지만 정답이라는 게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죠.”
- 서영웅 씨(중문농협APC)
다음달 1일부터 5인 이상,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해서도 주 52시간 근무제가 전면 시행되지만 농업 현장에선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양새다. 고작 보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속 시원한 해법을 쥐지 못한 미곡종합처리장(RPC)과 농산물산지유통센터(APC)들은 답답함에 한숨만 쉬고 있다.
근로자들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다. 노동 시간 단축에 주 52시간 근무제를 반기는 이들도 있지만 성수기에 바짝 용돈벌이를 해오던 임시직 근로자들은 오히려 불만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에 주 52시간 근무제를 둘러싸고 여러 속사정이 얽혀 있는 농업 현장을 들여다봤다.
# 시설 확충·전문인력 충원 필요하지만 단기간에 해결 어려워
주 52시간 근무제 적용을 앞두고 가장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새어나오는 곳은 지역 RPC들이다. 지금도 벼 수확기면 밤낮 없이 기계를 가동해도 수매 물량을 제때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뾰족한 대책 없이 주 52시간 근무제를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지역 RPC들은 “그저 뒷짐만 지고 있었던 건 아니다”며 “인력 확충, 탄력적 근로시간제(이하 탄력근로제) 활용 방안 등 어려움을 타개해 나갈 묘수를 찾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한계점이 너무 명확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문균 보성군농협쌀조합공동사업법인 대표이사는 “수확기에 수매장 한 곳당 하루 100톤 이상 물량이 밀려드는 때도 있지만 24시간 기계를 가동해도 50~60톤도 소화하기 어려워 2~3일에 걸쳐 처리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며 “쌀의 품질, 안전과 직결되는 터라 아무 인력이나 쓸 수도 없는데 근로시간마저 제약이 있다 보니 앞으로 수확기에 쏟아지는 물량을 어떻게 처리해 나갈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벼는 도정·건조 전 노상 방치 시간에 따라 미질에서 큰 차이가 나 마냥 시간을 두고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농업인들과 수확 일정을 조율하며 수매 물량을 분산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결국 시설 확충과 전문 인력 충원 등이 근본 해결책이 될 수밖에 없는데, 비용 부담이 크고 단기간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여서 아직 많은 RPC들이 이 같은 결정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차상락 농협RPC전국협의회장은 “다음달 1일부터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지만 현장에선 탄력근로제를 적용해도 쌀 수확기에는 근로시간이 턱 없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이라며 “이 같은 현실을 반영해 벼 수확기 때만이라도 근로시간을 조금 더 연장 적용할 수 있도록 특례를 적용해 줄 것을 정부에 강력 건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 숙련 근로자 이탈 조짐...현장 우려 가중
농산물산지유통센터(APC)에서도 인력 수급과 관련해선 비슷한 문제들로 고심하고 있다. 특히 단기 인력 수급과 관련해선 나름의 대책을 마련해 나가고 있지만 안정적인 인력 수급은 더 어려워질 것이란 우려가 크다.
김대웅 밀양농협 원예농산물산지유통센터 대리는 “단기 근로자의 경우 몇 개월 바짝 일하며 추가 수당 등으로 낮은 기본임금을 충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근로시간 제한으로 전체 임금이 낮아져 오히려 불만스럽다는 이야기가 들린다”며 “탄력근무제를 적용하면 비성수기엔 하루 4~5시간밖에 일을 못하게 되는데 이 때에는 임금 높은 숙련 근로자들이 굳이 APC에서 일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 인력 이탈 문제에 부딪히게 될 것”이라고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 김 대리는 “더 일 하고 싶은 사람은 일 할 수 있도록 해 생활의 안정을 꾀하고 만족할 만한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게 맞지 않느냐”며 “차라리 지도, 감독을 잘 해서 시간 외 근무시간에 대한 임금이 정당하게 지불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 탄력근로자 더 유연하게 적용해야
정부는 이 같은 현장의 어려움을 완화하고자 탄력근로제의 단위기간을 기존 3개월에서 최대 6개월로 연장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여전히 인력 운용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단위기간을 보다 유연하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거세다. 노사 합의를 전제로 단위기간을 확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은 주요 국가들에 비해 짧은 편이다. 미국과 일본, 프랑스의 경우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1년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독일은 최대 6개월로 정하고 있지만 노사 합의 시에는 6개월을 초과하는 것도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주 52시간 근무제는 근로자의 삶의 질 제고라는 측면에서 종국적으로 가야할 방향이지만 현장의 상황이나 여건 등을 봐가며 실행해야 한다”며 “해외 사례 등을 참고해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조정 등 현장이 따라올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함께 고민해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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