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물값은 반토막 났고 인건비는 크게 올랐는데, 이제는 농산물 포장상자값마저 상승해 농사지어도 남는 게 없네요.”
충남 서산시 해미면에서 5940㎡(1800평) 규모로 하우스 감자를 재배하는 김인환씨(70)의 푸념이다. 김씨는 최근 농협에다 올해 사용한 감자 포장상자값 정산을 하면서 깜짝 놀랐다. 지난해 1200원이었던 20㎏들이 골판지상자 한개 가격이 1500원으로 무려 300원이나 오른 것. 800개의 상자를 사용한 김씨는 지난해보다 24만원이나 더 지출했다.
올해 감자값이 크게 안 좋은 상황에서 포장상자 구입비 부담마저 늘어난 것. 김씨는 “5일 감자를 처음 출하할 때 20㎏ 한상자에 3만4000원을 받았지만, 이후 감자값이 계속 떨어져 마지막 출하였던 16일에는 2만8000원에 불과했다”며 “4만8000∼5만원이었던 지난해의 절반 수준”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인건비는 지난해보다 1인당 하루 4만∼5만원이나 더 들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지난해 10월 경기 안산의 한 제지공장 화재로 촉발된 ‘골판지상자 대란’의 불똥이 농업계로도 튀고 있다. 화재로 인해 골판지 원지 공급이 줄면서 농산물 포장용 골판지상자값이 크게 오른 것이다. 이 공장은 국내 골판지 원지 공급량의 약 7%를 담당해왔다.
한국골판지포장산업협동조합에 따르면 현재 골판지 원지가격은 두차례 인상을 거치며 화재 이전보다 30∼40%나 올랐다. 1t당 35만원이던 골심지가격은 현재 49만원으로, 라이너는 같은 기간 45만원에서 59만원으로 뛰었다. 골심지는 골판지의 중간에 들어가는 구불구불한 종이고, 라이너는 골심지 위아래에 붙는 평평한 종이다.
연간 15만개의 쌀 택배 포장용 상자를 사용하는 충남 당진해나루쌀조합공동사업법인(대표 박승석)은 화재 이전 1개당 650원이던 상자값이 지금은 780원으로 올랐다고 밝혔다. 추가되는 상자 구입비만 연간 1950만원에 달한다. 박승석 대표는 “원료곡값이 올라 가뜩이나 경영이 불안한데 상자값까지 상승해 부담이 만만치 않다”며 “지대미 포장재값까지 올려달라는 요구도 있다”고 말했다.
돈을 주고도 골판지상자를 구하기 힘든 상황도 연출되고 있다. 충남 예산에서 멜론을 직거래로 판매하는 이기순씨(57)는 “예전에는 포장상자를 주문하면 10일 정도 뒤면 받아볼 수 있었는데, 7일 주문한 상자가 (24일 현재)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명환 부여 장암농협 농산물산지유통센터(APC) 장장은 “상자값이 인상된 데다 발주 후 물량을 바로바로 받지 못해 신경이 곤두서 있다”며 “상자가 떨어지면 농산물 출하를 할 수 없게 돼 보통 문제가 아니다”고 전했다.
문제는 이러한 수급 불안이 상당 기간 지속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택배용 골판지상자의 수요가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또한 골판지 원지 수출가격이 강세여서 수출이 언제든 늘어날 수 있다. 현재 정부의 요청으로 제지업체들이 수출을 최소화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수급 불안에 따른 사재기가 여전하다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이로 인해 골판지 원지가격이 추가 인상될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김진모 한국골판지포장산업협동조합 전무이사는 “5월 이후 여러 농산물의 출하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면 농산물용 상자 수요도 늘어나게 된다”며 “골판지 원지 공급량을 늘리지 않으면 7∼9월쯤 원지가격이 더 오를 수 있다”고 말했다.
방울토마토 포장용 골판지상자를 생산하는 마하칼라팩의 안종한 대표는 “현재 골판지상자 시장에는 수급 불안으로 인해 가수요까지 붙어 있는 상황”이라며 “정부의 폐지수입 제한정책을 일시적으로라도 완화하고 수출을 강력히 억제하는 등 골판지 원지 공급을 획기적으로 늘리기 위한 방안을 시행해야 골판지상자값이 안정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