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전남 함평의 한 배추 저장창고. 새벽부터 배추 작업이 한창이다.
② 배추 파렛트 랩핑작업 모습. 파렛트가 제자리에서 돌면 랩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자동으로 랩핑이 되도록 만든다.
③ 5톤 차량에 적재된 배추. 여기에는 배추 약 1000망(3000포기)이 실린다.
④ 이재천 씨는 배추 농민이자 산지유통인이다. 생산과 유통에 20년 이상 종사했다
[르포] “배추 수급! 산지유통인 없으면 안되죠”
생산·유통 전문가, 규모의 경제로 효율 극대화
농약·비료 전담팀 운용 유동성 리스크도 부담
산지 유통도 양극화 심화... 정책적 지원 필요
한국농업신문 박현욱 기자 2025. 3. 25
배추 한 포기가 우리 손에 들어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칠까. 농민이 씨를 뿌리고 유통 상인을 거쳐 일선 마트에 도착하면 소비자 손에 들어오는 지극히 간단한 공식. 말처럼 간단하다면 농산물 수급은 ‘이상무’다. 하지만 매년 배추가격은 오르락 내리락 바람 잘 날 없다. 따라서 이 간단한 공식을 흔드는 수많은 변수가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등장하는 농산물 유통개혁. ‘마진독식’ 문제가 하나의 세트처럼 따라붙고 마치 해법인양 유통을 ‘기득권’으로 치환해 버린다. 일각에서 말하는 “유통이 다 가져간다”라는 말이 정답은 아니더라도 정답에 가까우려면 5년, 아니 10년 안에 유통은 공룡처럼 몸집을 불려야 마땅하다.
하지만 실상은 거꾸로다. 유통인 수는 내리막, 그나마도 고령화로 심각하게 쪼그라들고 있다. 농산물 유통 공식에 어떤 변수들이 있는지 한국농업신문이 배추를 중심으로 국내 농산물 유통을 산지부터 소비지까지 훑는다.
# 전남 함평 배추 저장창고 현장
파렛트 위에 9단으로 차곡차곡 쌓인 그물망 배추들이 투명한 랩으로 단단히 감싸진다. 유통 과정에서 배추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주위에 있는 3~4대의 지게차가 속도를 내며 배추를 옮기고 작업자들의 손이 한껏 빨라진다.
전라남도 함평 장군로에 위치한 배추 저장창고. 이른 새벽부터 창고 안은 바쁘게 돌아간다. 천장을 찌를 듯한 규모의 공간에는 수천 망의 배추가 출하를 기다리며 쌓여 있다. 5톤 트럭 한 대에 차곡차곡 쌓이자 어느샌가 물샐틈없이 빼곡히 들어찼다.
5톤 차량이 향하는 곳은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 전남 함평이 출발지라면 가까운 도매시장이 있기 마련인데 지방도매시장은 한꺼번에 많은 물량을 소화하기에는 버겁다. 국내 최대 도매시장인 가락시장에 농산물이 몰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배추 농민이자 산지유통인인 이재천(54)씨가 배추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방금 작업을 끝낸 배추 출하주다. “오늘 배추 좋네”라며 너스레를 떤다. 마침 김치 기업 종가(종가집)에서 배추 상태를 확인하러 왔다. “계약 물량 확인하러 왔어요.” 허리춤에 찬 칼로 배추 하나를 쿡 찌르더니 “나쁘지 않네요”라고 답한다.
# 배추가 비싸다는 오해
5톤 트럭 한 대에는 약 1000망의 배추가 실린다. 1망에 배추 3포기가 들어가니 총 3000포기다. 도매시장에서 배추 1망이 1만원에 낙찰된다면, 트럭 한 대 분량은 총 1000만 원이 된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이 ‘1000만원’은 온전한 수익이 아니다. 이재천 씨는 “일단 300만원은 묻고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는 “수확 작업비부터 시작해, 저장창고까지의 운송비, 보관료, 재포장 작업비, 가락동까지의 물류비, 감모 손실까지 다 합치면 적어도 300 이상이 들어간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종자·농약 구입비, 작업조 운영비, 포전거래비 등 산지에서의 각종 부대비용까지 포함하면 순수한 원가는 850만~900만원 선까지 치솟는다. 결국 트럭 한 대 분량을 출하하더라도, 실질적인 이익은 턱없이 부족한 셈이다.
이 씨는 “배추 1망에 1만원을 넘게 받아야 간신히 입에 풀칠할 수 있다”며 “가령 망당 1만원이면 배추 1포기 가격은 약 3300원꼴인데, 소비자들은 이 가격만 들어도 비싸다고 말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국내 농산물 중 배추는 관리할 것도 많고, 유통 구조도 까다롭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오히려 배추를 싸게 먹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산지유통인, 상품성 키우는 데 올인
배추를 싸게 먹는다고 하는 이유는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서다. 국내에서 개별 농민이 배추를 생산하기에는 쉽지 않다. 국내 대부분의 농가가 밭떼기 거래, 즉 종자만 파종하고 산지유통인에게 맡기는 ‘포전거래’를 한다.
이유는 배추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배추는 재배하기 까다롭고 유통하기는 더 어렵다. 병해충에도 취약하고 여름에는 물러 터져 녹아내릴 뿐만 아니라 (과일에 비해) 몸집도 커 가성비가 나오지 않는다.
여름에는 스프링클러와 같은 시설 장비가 필수고, 각종 작물보호제와 비료 등을 듬뿍 줘야 상품성 좋은 배추가 생산된다. 개별 농민이 감당하기에는 ‘돈’과 ‘품’이 많이 들어 엄두조차 내기 힘들다.
이재천 씨는 강원도에서 2만평 배추 농사를 직접 짓는다. 20대부터 농사를 시작했으니 20년 이상 농사로 먹고 살았다. 유통도 겸업했다. 사실상 ‘반농반상(半農半商)’인 셈이다. 때문에 농민들의 마음, 유통인의 고충에도 빠삭하다.
이 씨는 전국 팔도를 돌아다닌다. 겨울에는 해남, 봄에는 충남, 여름에는 강원, 다시 해남으로 유턴한다. 전국에 머물 곳을 마련해 스스로를 ‘장돌뱅이 인생’이라 부른다. 이 씨의 동선처럼 국내 배추는 365일 전국에서 생산된다. 월동배추 주산지는 해남, 진도, 무안이다. 봄배추는 문경, 영양, 예산, 고랭지(여름)배추는 평창, 정선, 태백, 가을배추는 해남, 고창 등지다. 동쪽을 중심으로 전국을 한 바퀴 휘도는 셈이다.
심는 품종도 다양하다. 월동배추는 ‘청남·겨울왕국·남도장군·월동장군’이 봄배추는 ‘춘광·대통·하이스타배추’ 등이 득세한다. 고랭지배추는 병해충에 강한 품종이 잘 팔린다. ‘오대·썸머탑·수호·여름왕국’ 등이 선택받으며, 가을배추는 ‘청명가을·휘파람·추광’을 선호한다.
이 씨는 “산지유통인은 종자 선택부터 시작해 작물보호제, 비료 시비까지 배추라는 상품을 만드는 데는 전문가 중 전문가”라면서 “산지유통인이 없다면 지금보다 배는 쳐줘야 배추를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 유통개혁, 현 상황 인지부터
실제 국내 배추 유통의 70% 이상을 산지유통인이 전담하고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김치공장과의 직거래를 산지유통인 경유로 볼 건지에 대한 명확한 경계가 없어 추정치만 있지만 대체로 봄가을 배추는 85%, 여름겨울배추는 70%가 산지유통인을 경유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처럼 유통 구조가 유통인 중심으로 재편된 이유는 극도의 효율성과 전문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일반 농민이 배추를 재배하고 유통까지 감당하려 한다면, 현재와 같은 상품 품질을 유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없어 배추 가격이 2배 이상 치솟을 가능성도 크다.
산지유통인이 유통을 전담하게 된 또 하나의 배경은 인력 문제다. 배추는 재배 과정에서 수분 공급, 비료 시비, 작물보호제 살포 등 지속적인 관리가 필수다. 때문에 산지유통인은 자체 비료·농약 전담팀을 운영하며, 전국을 돌며 작업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공백 없이 인력을 운용한다. 이는 일반 농가가 감당하기 힘든 노동력과 자본 투입이다.
이재천 씨는 “배추 가격이 조금만 오르면 유통인이 폭리를 취한 것처럼 보도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며 “상품성 있는 배추를 생산하기 위해 자본을 투입하고, 가격이 폭락했을 때는 농민 대신 손실을 감당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그는 “산지유통인은 일종의 ‘위험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산지유통은 막대한 이익을 보장하는 사업이 아니다. 오히려 수익과 손실폭이 크고 가격 변동성도 심해 유동성 위기를 겪는 경우가 잦다. 실제로 가격 폭락으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유통인의 안타까운 사례도 있다.
산지유통인 단체인 한국농업유통법인중앙연합회에 따르면 1995년 수집상 등록제가 생겼을 당시 1만2993명이었던 산지유통인의 숫자는 현재 2000명 남짓으로 추정된다. 30년 사이 10명 중 9명이 간판을 내린 셈이다. 이는 극심한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 씨는 “산지유통인이 무너지면, 국내 배추 수급은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다”면서 “농산물 유통을 개혁하려면 현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채소 유통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산지유통인의 역할을 재조명하고 지속 가능성을 위해 정책적 지원도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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