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08 05:26 박현욱 기자
‘거래→저온·공동·거점 물류’ 공간 재편 중
면적은 ↓ 물류는 ↑… '콤팩트화' 확산
수수료 수익 한계 봉착 민간 투자 확대
(한국농업신문=박현욱 기자) 일본 도매시장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과거 도매시장이 경매를 통해 가격을 발견하는 ‘거래 공간’이었다면, 최근에는 저온유통·공동물류·거점배송 기능을 수행하는 ‘물류 공간’으로 재편되고 있다.
아사누마 스스무 대표는 지난 6일 일본 지바현 인자이시 인바니혼이다이 에키마에 호텔에서 (사)한국농수산물도매시장법인협회 주최로 한국 농업전문지 기자단과의 간담회를 갖고 “2020년 도매시장법 개정 이후 일본 도매시장은 규제 중심에서 자율화 중심으로 방향을 바꿨다”며 “최근 시장 시설 정비의 핵심은 콤팩트화와 물류 기능 강화”라고 설명했다.
일본은 2019년 도매시장법을 개정하고 2020년부터 시행했다. 개정 이후 도매시장 운영은 과거보다 민간 자율성이 확대됐다. 거래 방식과 시장 운영에 대한 공적 규제는 완화되고, 도매법인과 중도매인의 경영 판단이 중요해진 셈이다.
(경매장보다 물류 거점 기능 중시)
가장 큰 변화는 도매시장의 기능 전환이다. 과거에는 경매를 통한 공정한 가격 형성이 핵심이었다면 최근 일본 도매시장은 산지에서 반입된 농산물을 저온 상태로 유지하고, 대형마트·슈퍼마켓·외식업체 등 소비지 수요처에 안정적으로 배송하는 기능을 강화하고 있다.
아사누마 대표는 “최근 도매시장은 거래 장소라기보다 물류 장소로서의 기능이 강화되고 있다”며 “저온 보관, 배송, 소분, 가공 기능을 갖춘 시장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일본의 ‘물류 문제’와도 맞물려 있다. 트럭 운전기사 노동시간 규제가 강화되면서 장거리 운송에 한계가 생겼고, 이에 따라 공동물류, 거점물류, 대량 환적, 철도·선박 등으로 운송수단을 전환하는 '모달 시프트(Modal Shift)' 필요성이 커졌다.
(콤팩트화, 부지 줄이고 기능은 집약)
일본 도매시장 시설 정비의 또 다른 키워드는 ‘콤팩트화’다. 시장 부지는 줄이되, 입고·거래·보관·소분·출고 기능은 한 공간에 집약하는 방식이다.
간담회에서 소개된 이즈카시 공설 지방도매시장의 경우 기존 6만4000㎡ 규모의 시장 부지를 2만8835㎡ 수준으로 줄였다. 대신 중앙 통로를 넓게 두고, 양쪽에 냉장·냉동시설을 배치해 물류 효율을 높였다.
채소동, 과일동처럼 품목별로 건물을 나누기보다 하나의 건물 안에 채소와 과일, 보관, 가공, 배송 기능을 통합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아사누마 대표는 “일본은 한 공간 안에서 거래, 포장, 소분, 배송이 이뤄지도록 시장을 집약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한국의 가락시장처럼 채소와 과일, 엽채류와 근채류를 나누는 방식과는 반대 흐름이다.
(시설 사용료 부담 줄이려는 현실적 선택)
콤팩트화의 배경에는 도매법인과 중도매인의 경영 부담도 자리한다. 시장 면적이 클수록 시설 사용료와 시장 사용료 부담이 커진다. 취급 물량과 수익성은 줄어드는 반면, 노후 시설 유지비와 사용료 부담이 계속돼서다.
일본에서는 개설자가 전체 시설을 모두 지어 임대하는 방식보다, 개설자는 기본 건물을 조성하고 실제 냉장·가공·물류설비는 사업자가 직접 투자하는 방식도 주목받고 있다.
사업자 입장에서는 필요한 시설을 직접 설치하면 감가상각 이후 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반대로 개설자가 모든 시설을 조성하면, 사업자는 20년, 30년 동안 사용료를 계속 부담해야 한다.
(노후 시장 많지만 재건축은 쉽지 않아)
일본의 도매시장도 어려움을 겪는 곳이 많다. 중앙도매시장 64곳 가운데 상당수는 개장 후 40년 이상 지난 노후 시장이다. 그러나 시설 정비는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비용이다.
아사누마 대표는 “연간 200~300억엔을 취급하는 시장을 재정비하는 데 400~600억엔이 들 수 있다”며 “취급액의 두 배 가까운 비용을 사업자가 사용료로 갚아야 하는 구조에서는 시설 정비가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행정 주도의 시설 정비 방식도 한계로 지적됐다. 대형 설계·건설업체가 참여하면서 시설이 과도하게 고도화되고, 결과적으로 업계가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민간 투자형 물류시설도 등장)
이 같은 한계를 넘기 위한 사례로 기타큐슈 청과의 ‘마루키타 로지베이스’ 사례가 소개됐다. 기존 중앙도매시장 시설이 노후화됐지만 행정이 전면 재정비를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도매법인이 직접 물류센터를 조성한 사례다.
민간 사업자가 장기 임차권을 확보하고 직접 건물을 지으면서 시장 사용료 부담을 줄였다.
아사누마 대표는 “행정 관여를 최소화하고 사업자가 자기 부담으로 필요한 기능을 정비한 사례”라며 “기존 방식보다 비용을 3분의 1가량 절감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도매법인, 수수료 수익 한계 봉착)
일본 도매법인의 경영 환경도 녹록지 않다. 채소 수수료는 8.5%, 과일 수수료는 7% 수준이지만 산지 출하 장려금, 중도매인 장려금, 운영비 등을 제외하면 실제 영업이익률은 0.7~0.8% 수준에 그친다.
때문에 도매법인들은 기존 수수료 수익에만 의존하지 않고 새로운 수익원을 찾고 있다. 물류, 가공, 배송, 데이터, 외부 기업과의 연계가 중요해지는 이유다.
최근에는 슈퍼마켓, IT기업, 외식업체 등 타업종 기업이 도매시장 법인에 진입하거나 인수하는 흐름도 나타나고 있다는 게 아사누마 대표의 설명이다. 도매시장이 도심 내 핵심 물류 거점으로 재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도매법인 역할 재정립 필요)
일본 도매시장의 변화가 한국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일본은 JA, 즉 농협 계통 조직이 산지 조직화와 출하 조절에서 강한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은 산지 조직화, 출하 규모화, 도매법인의 역할을 둘러싼 논의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유통 전문가들은 "일본과 한국은 산지 조직화 수준과 농협 체계 등 여건이 다르지만, 소비지의 안정적 공급 요구가 커지면서 도매시장이 단순 거래 공간에서 물류·수급조절 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는 흐름은 비슷하다"며 "정가·수의매매 확대를 추진한다면 이에 맞는 제도적 기반과 도매법인의 역할 재정립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도매시장이 산지와 소비지를 안정적으로 연결하는 기능을 수행하려면 물류·보관·수급조절에 필요한 투자와 위험을 부담할 수 있는 제도적 여건이 마련돼야 한다"며 "일본 사례는 시설 현대화 자체보다 도매시장의 기능을 어떻게 재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출처 : 한국농업신문(http://www.newsfarm.co.kr)